여러분 우리가 너무나도 자주 얘기하는 ‘사랑’이 우리말 일까요? 아닐까요? 정답은, 우리말 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합니다. 왜냐구요?
우리말이라는 주장은 첫째, 어원이 ‘살’입니다. ‘피부’의 의미입니다. ‘살’에서 사람, 사랑, 삶이 파생되어 ‘사람이 사람을 생각하는 것’이 사랑이라고 합니다 두 번째로, ‘사랑’의 옛말은 ‘다솜’이며, 동사 ‘사랑하다’의 옛말은 ‘괴다’라고 합니다. ‘괴다’, ‘고이다’의 원 뜻은 ‘생각하다’인데, 이는 사랑한다는 것이 누군가를 끊임없이 생각하는 것이니 의미로는 첫 번째와 일맥상통합니다. 다른 주장으로는 ‘사랑’은 한국어의 조상격인 르완다어 saranganya로 ‘나누다 (to share)’ ‘미치다’ ‘빼앗기다’ 의 뜻이 있으며 ‘나도 모르게 마음을 빼앗기며 나누는 것’을 의미한다는 주장입니다.
현대어의 ‘사랑’은 15세기에 ‘ 랑’이었는데 당시에는 ‘애(愛)’의 의미 뿐만 아니라 ‘사(思), 모(慕)’의 의미도 있으며, 당시는 ‘생각’의 의미가 더 많았다고 합니다. 즉, ‘ 량’은 ‘깊이 생각하며 헤아린다’의 의미를 가진다고 합니다. 이렇게 ‘ 랑’과 의미와 소리가 유사하여 연관성을 추측해 볼 수도 있으나, 다른 견해로는 ‘랑’은 분량과 수량을 뜻하는 ‘량’에서 변한 것으로 ‘많다’의 의미로도 해석합니다. 즉, 의미적 변화는 ‘사(思)>모(慕)>애(愛)’의 변화 과정을 거쳐 ‘많이 생각한다’가 되었다는 견해 입니다. 즉, 사랑이란 "어떤 상대를 애틋하게 그리워하고 열렬히 좋아하거나 다른 사람을 아끼고 위하며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일컫습니다.
'사랑'을 영어로 'Love'이죠? 이 단어는 어찌 만들어 졌을까요?. 원래 '기뻐하다'라는 뜻인 라틴어 'Lubere'에서 유래됐다고 합니다. 다른 의견으로는 love의 고대 영어는 lufian으로서, 고대 게르만어 lubon (to cherish, approach)에서 유래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게르만어의 조상어인 르완다어 robanura 는 '선택하여 곁에 두다 (to select, set aside)'의 뜻이 있습니다. 결국, love는 르완다어 robanura (to select, set aside)에서 게르만어 lubon (to cherish, approach)를 거쳐 유래한 것으로서, ‘선택하여 곁에 두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이것을 종합하면, 한국어 ‘사랑’은 ‘깊이 생각하며 헤아리고 소중히 하는 것’이며, 영어 ‘love’는 ‘사랑하는 사람(사물)을 곁에 두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따라서, ‘사랑’은 ‘생각의 관점’에서, ‘love’는 ‘행동의 관점’에서 표현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미국 목사 게리 체프먼은 그의 저서에서 사랑의 5가지 언어로 ‘인정하는 말’ ‘함께하는 시간’ ‘선물’ ‘봉사’ ‘스킨 쉽’을 제시하였습니다. 다소 인정할 수 없어도 인정해 주어야 하며, 바빠도 상대방을 위하여 시간을 내 주어야 하며, 상대방에게 마음의 선물을 주어야 하고 상대방을 위하여 나를 희생하여 봉사해 주어야 하고 자연적 스킨 쉽과 함께 의도적 스킨 쉽도 해 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사랑이 열매를 맺습니다. 그래야 사랑의 열매가 지속적으로 맺을 수 있습니다. 선물을 영어로 gift라고 하는데 이는 give와 같은 어원에서 출발합니다. 사랑은 주는 것입니다. 주는 사랑이 열매를 맺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우리를 위하여 당신의 생명을 주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심은 우리의 죄 때문입니다. 우리를 위하여 대속제물이 되어 주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15:9에서,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셨습니다. 내리 사랑, 주는 사랑입니다.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사랑을 주셨습니다. 12절에서도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사랑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서로 사랑을 주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자주 부르는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찬양곡이 있습니다. 우리는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다고 합니다. 그 사랑을 누가 줍니까? ‘태초부터 시작된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태어나기 전부터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고 지금도 받고 있으며 앞으로도 많은 사랑을 받게 된다고 합니다. 그 받은 사랑을 이웃에게, 곁에 있는 사람에게 주어야 합니다. 세상 노래에도 ‘사랑은 주는 것’이라는 가요가 있습니다. 1969년에 발표한, 지금도 ‘테스 형’으로 유명한 나훈아씨 노래입니다. 가사에 ‘사랑은 주는 것, 아낌없이 주는 것, 미련없이 주는 것, 영원히 주는 것, 아름답게 주는 것’ 이라고 노래합니다. 성경 얘기 아닙니까?
여러분예수님께서는 붙잡히시기 전에 마지막까지 사랑의 행동을 보여주셨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13:1에서,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하면서 그 다음절부터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러시면서 15절에서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웃에게 사랑을 주라고 하십니다. 내용의 중간 부분에 하신 말씀 중,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이는 ‘내가 너에게 사랑을 주지 않으면 아무런 관계도 아니다’ 라고 하십니다. 내가 이웃에게 사랑을 주지 않으면 나와 이웃은 아무 관계도 아닌 것입니다.
코로나 펜더믹 시기에는 모두 만나기를 꺼려하고 아파트 옆집이지만 바로 위 아래에 살지만 모두 서로를 모른 척하면서 사는 이웃이 아닙니다. 사랑을 주어야 관계가 형성이 되는 것인데 너무나 안타까운 현실이었습니다. 그래도 사랑을 베풀어야 합니다. 그래도 이웃의 발을 씻어 주어야 합니다. 왜 하필 발을 씻어 주셨습니까? 손을 씻어 주시면서 말씀하셔도 되지 않나요? 사랑은 그런 것입니다. 상대방의 지저분하고 냄새 나는 발까지 씻어 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나의 속을 비우면서 주는 사랑이 진짜 사랑입니다. 주는 용서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나의 속을 비워야 용서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런 아름다운 주는 사랑을 하시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감사합니다
MDM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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