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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의 말씀

다비다와 나인성 과부

제목: 다비다와 나인성 과부

말씀: 사도행전 9:40-42   베드로가 사람을 다 내보내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돌이켜 시체를 향하여 이르되 다비다야 일어나라 하니 그가 눈을 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는지라 베드로가 손을 내밀어 일으키고 성도들과 과부들을 불러 들여 그가 살아난 것을 보이니 온 욥바 사람이 알고 많은 사람이 주를 믿더라’

 

오늘의 말씀의 주인공은 베드로와 다비다입니다. 죽은 바디바들 베드로가 다시 살리는 이적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이 모든 시나리오는 주님께서 하심을 또한 알 수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에 앞서 36절에서 다비다에 대하여 소개하기를, 욥바에 있는 여제자라고 소개합니다. 다비다가 있었던 욥바는 ‘아름다움’이란 뜻을 갖고 있습니다. ‘다비다’라는 이름은 아람어이며 헬라어로는 ‘도르가’입니다. 이는 암사슴 즉 ‘영양’을 말합니다. 이름을 소개한 후에 다비다에 대하여 개역개정에는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라고 하고, 우리말 성경에서는 ‘그녀는 언제나 선한 일을 하고 가난한 사람을 도왔습니다’라고 기록합니다. 이에 대한 사실은 39절에 기록되었습니다. 죽은 다비다와 베드로가 함께 있을 때 ‘모든 과부가 베드로 곁에 서서 울며 도르가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지은 속옷과 겉옷을 다 내보이거늘’하였습니다. 여기서 속옷은 지금으로 따지면 요사이의 내의가 아니라 셔츠 같은 것이며 그리고 겉옷이 셔츠 위에 입는 것입니다. 다비다가 살아 있을 때 과부들과 함께 옷을 만들어 팔면서 어려운 과부들을 도운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즉 다비다는 어려운 과부들과 함께 공동체를 이루며 리더로 활동하면서 그들에게 일 자리도 주고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도운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공동체 외의 사람들에게도 많은 도움을 주었던 것입니다. 공동체의 과부들이 베드로에게 생전에 다비다의 선행을 증거로 옷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를 통하여 우리는 다비다의 생전의 아름다운 삶을 알 수 있습니다.

 

여제자인 다비다는 주님의 가르침을 소중히 여기며 실천하는 진실한 제자의 삶을 살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어려운 가운데 있는 이웃에게 선행과 구제를 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다비다가 죽었습니다. 다비아의 상황은, 37절 38절 말씀에, ‘그 때에 병들어 죽으매 시체를 씻어 다락에 누이니라 룻다가 욥바에서 가까운지라 제자들이 베드로가 거기 있음을 듣고 두 사람을 보내어 지체말고 와 달라고 간청하여’ 라고 기록합니다. 성경에 의하면 다비다는 이미 죽어서 시체를 다락에 안치한 상황입니다. 그런데 다비다의 제자들은 장사를 치르지 않고 베드로를 청하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로 하여금 장사를 주관해 달라고 청한 것이 아닙니다. 그때 베드로는 욥바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룻다에 있었습니다. 거기서 8년동안 중풍병으로 누워있던 환자를 치료하는 이적을 행하였던 것입니다. 그 사실이 룻다와 인근 사론에 있는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그곳 사람들이 주께로 돌아오는 역사가 있었습니다. 과부들은 그런 베드로가 다비다를 다시 살려줄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었을 것입니다.

 

사도행전 9:40에서 베드로는 무릎을 꿇고 기도한 후 ‘다비다야 일어나라’하여, 죽은 다비다가 다시 살아났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죽은 지 나흘 후에 살리신 나사로를 연상케 합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가 무덤에 있는데 돌을 옮기라 하고 ‘나사로야 나오라(요11:43)’ 부르시니 살아나는 것을 생각나게 합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죽은 나인성 과부의 외아들을 살리실 때도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눅7:14)’하시니 그 청년이 살아 일어났습니다. 영적 명령에는 능력이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과 베드로의 죽은 사람을 다시 살리는 이적 자체가 성경에서는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닌 것입니다. 오늘의 과부 여제자인 다비다와 나인성 과부는 과부임에도 주변 사람들로부터 삶을 통하여 칭찬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의 얘기는 바로 복음 전파의 이야기로 이어집니다.

 

누가복음 7장의 나인성 과부의 외아들이 살아나는 이야기에 앞서 백부장의 종이 고침 받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너무나도 잘 알고 계신 내용입니다. 백부장의 사랑하는 종이 병들어 죽게 되어 사람을 예수님께 보냅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7:7에 ‘그러므로 내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하지 못할 줄을 알았나이다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 하니, 예수님께서는 이를 들으시고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인성 과부의 외아들을 살리는 이적이야기로 넘어갑니다. 베드로는 다비다를 살리기 전에 중풍병자 ‘애니아’를 치료하였습니다. 이야기 패턴이 유사하지요?

 

그러면 그 다음은 어떤 이야기가 있을까요? 누가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이러한 이적을 통하여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눅7:22)고 말씀하십니다. 사도행전에서는 베드로가 이방인 백부장 고넬료 집에서 설교하고 그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는 일이 일어납니다. 즉, 성경에서는 이적 그 자체가 아닌 이적을 통하여 일하시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전하는 복음 전파를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여제자이며 과부인 다비다와 나인성 과부의 외아들은 죽었지만 다시 살아났고, 두 과부의 선행은 감추어졌지만 세상에 드러났고 주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들의 죽음이 개인만을 위한 것이었다면 그 의미는 별로 중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건이 중요한 것은 그들의 삶이 선한 일을 하며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었기 때문이고 후세에도 영원히 주님의 사랑을 전파하며 주님을 따르는 제자도를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을 통하여 많은 사람이 주를 믿는 자리로 온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저와 여러분 모두가 복음의 통로가 되어 많은 사람들이 구원의 길로 인도되기를 축원드립니다.

 

감사합니다.

 

MDM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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